현종(玄宗)과 당(唐)의 몰락

2018.12.07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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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료설명


현종(玄宗)과 당(唐)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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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玄宗)과 당(唐)의 몰락

현종(玄宗)과 당(唐)의 몰락



목차



Ⅰ. 머리말

Ⅱ. 현종(玄宗) : 개원(開元)의 치

Ⅲ. 양귀비(楊貴妃)와 현종의 실정

Ⅳ. 안·사의 난과 당(唐)의 몰락

Ⅴ. 맺음말

2. 목차 및 본문내용


현종(玄宗)과 당(唐)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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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체계적인 제도의 완비와 국제적인 문화의 발전으로 고대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했던 중국의 당(唐)은 수(隋)나라에 이어 건국된 통일 왕조로서, 20대에 걸쳐 약 300년 동안 존속하며 굉장한 번영을 누린 제국이다. 그 대표적인 치세로는 제 2대 황제인 태종(太宗)의 정관(貞觀)의 치와 제 6대 황제인 현종(玄宗)의 개원(開元)의 치가 있다. 태종의 ‘정관의 치세’가 당의 국력의 기틀을 확고히 한 시기라면 23년에 걸친 현종의 ‘개원의 치세’는 당의 국력이 최절정에 이른 시기로, 정치, 문화,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한 빛을 발하던 시기다. 그러나 이 현종 대에는 당의 극성기와 몰락을 동시에 겪은 시기이다. 현종은 노년에 접어들어 양귀비에 빠져 정치를 등한시하였으며, 안·사의 난의 발발로 당은 더욱 쇠퇴의 길을 걷는다.

이 글에서는 현명한 치세로 당을 황금기로 이끌어 가던 현종의 업적과 후에 양귀비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던 그의 실정에 대해 알아보고, 더불어 안·사의 난을 통해 당시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대제국이었던 당이 몰락한 배경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Ⅱ. 현종(玄宗) : 개원(開元)의 치

현종은(玄宗) 본명 이융기(李隆基)로, 무측천(武則天)의 아들인 예종(睿宗)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중종(中宗)을 죽이고 권력을 얻으려 한 위황후(韋皇后) 및 그 딸인 안락공주(安樂公主)를 몰아내어 아버지 예종을 제위에 옹립하고 자신은 황태자가 되어 실권을 잡았다. 716년, 28세의 그는 마침내 예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그리고 당시 그와 대등한 권세를 가졌던 태평공주(太平公主) 일파를 타도하여 무측천 이래 반세기에 걸친 여성의 전권 시대를 근절시켰다. 이렇게 즉위 한 현종이 다스린 개원(開元)연간(713~741년) 29년과 천보(天寶)연간(742~756년) 14년을 포함한 43년의 치세를 개원천보시대(713∼756년)라고 일컫는다.

황제로서의 정권을 장악하게 된 현종은 우선 황권을 위협하고 조정을 방해하는 두 가지 주요 세력으로 첫째가 황친과 외척이며, 둘째가 원로공신임을 알고, 이 두 가지 세력의 팽창을 막고자 하였다. 따라서 형제들에게 따뜻한 우애를 표시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엄격하게 제한하여 황위를 공고히 하였다. 또한 왕들이 조정의 관리들과 왕래하는 것을 금지하여 조정에서 사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방지하였다. 또 그는 공신과의 관계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일단 그들의 권세가 커진 것을 발견하면 즉시 지위를 삭탈하였다. 염수성(閻守誠), 오종국(吳宗國), 임대희, 우성민 옮김, 『당현종』, 서경문화사, 2012, p87.

이러한 조치를 통해 현종은 즉위 초기부터 황위를 강화하고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현종은 남다른 안목으로 초년부터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곧 그의 정치를 성공으로 이끄는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재로서 ‘구시재상(시대를 구한 재상)’이라 불리는 요숭(姚崇)을 비롯하여 송경(宋璟), 장가정(張嘉貞), 장열(張說), 이원굉(李元紘), 한휴(韓休), 장구령(張九齡) 등이 있다.

그는 요숭(姚崇)과 같은 현명한 재상들의 의견을 정책에 적극 반영하였다. 우선 관리들의 행정을 정돈하고 쇄신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특히 현령(縣令)과 자사(刺史)와 같은 지방장관의 선발에 주의를 기울여, 수도를 중시하고 지방을 경시하는 풍조를 개혁하였으며, 중앙의 기구와 관리의 감찰을 강화하였다.

이렇게 관리들의 행정을 바로잡음과 동시에 그는 국가재정을 개선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였다. 귀족들의 사치와 낭비를 금하고, 승려와 비구니들을 도태시키는 등 재정을 문란하게 하는 문제들을 개선하였다. 부유한 통치 계층들은 주옥과 진귀한 보물, 비단과 같은 고급스러운 사치성 소비품을 추구함으로써 대량의 인력과 물력, 재력을 소비하였으며, 이는 사회 생산과 경제 발전에 조금도 이익이 되지 않았다. 이에 현종은 주옥과 비단 자수에 대한 무제한적인 생산과 사용을 막음으로써 사치와 소비성 풍조를 근절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무측전 시대 이래 불교의 발전으로 승려의 인원이 늘고 사원의 축조가 증가함에 따라 백성들이 바치는 공물과 세금에 부담이 커지자 현종은 불교를 억제시키고 승려를 도태시켜 국가 재정을 개선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염수성(閻守誠), 오종국(吳宗國), 임대희, 우성민 옮김, 『위의 책』, p106~110.

또한 도호 일반 민호가 국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제멋대로 타 지역으로 이주하는 호구를 말한다.

의 문제를 개선한 토지조사와 호구조사를 통해 재정 수입을 증가시켰다.

현종의 초기 치세는 이렇듯 그의 현명한 정치력과 유능한 재상들의 도움으로 폐정이 혁신되고 천하가 태평하였으며, 재정도 충실해졌다. 이러한 당의 황금기를 일컬어 ‘개원(開元)의 치’라고 부른다. 태종(太宗) 때 3백만이 되지 않았던 호구 수가 개원 14년(726년)에 7,609,564호로 증가하고, 인수는 41,419,712명이나 도달하였다는 사실은 현종의 통치 하에 이룩되었던 이러한 당의 태평성세를 잘 보여준다. 노노메 조후(布目潮渢), 구리하라 마쓰오(栗原益男), 슈도 요시유키(周藤吉之), 임대희 옮김, 『중국의 역사【수·당·오대】』, 혜안, 2001, p115.





Ⅲ. 양귀비(楊貴妃)와 현종의 실정

개원연간 이후 이어지는 천보연간에는 그렇게 번영했던 당 왕조의 발전도 급격히 퇴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현상은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잠재해 있던 경제·사회적인 병폐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당시 간신들의 횡포와 현종의 양귀비(楊貴妃)에 대한 무분별한 총애가 주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2』, 청아출판사, 2006, p462.



양귀비의 본명은 양옥환(楊玉環)으로, 원래는 현종이 총애한 무혜비(武惠妃)의 열여덟째 아들인 수왕 이모(李瑁)의 아내, 즉 현종의 며느리였다. 중국 4대 미인 중 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듯, 그녀의 출중한 미모와 뛰어난 재주는 사랑하던 무혜비를 잃고 실의에 빠져있던 현종의 눈에 띄기에 충분했다. 현종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여도사(女道士)로 삼아 우선 남궁에서 살게 하고, 태진(太眞)이라는 호를 내려 남궁을 태진궁(太眞宮)이라 개칭하였다. 김희영, 『위의 책』, p465.

6년 후, 그녀는 귀비로 책봉되어 양귀비가 되었다. 재위 30년을 넘기며 정무에 싫증을 내던 현종은 여색에 빠져 정치는 재상 이림보(李林甫) 현종 때의 정계에는 과거(진시과)에 의해 등용된 관료와 문벌에 의해 등용된 관료들 사이에 파벌 싸움이 있었다. 당시 진사파의 대표자는 장열(張說), 장구령(張九齡) 등 이었고, 문벌파의 대표자는 이림보(李林甫)였다. 이림보는 당 고조의 조부인 이호(李虎)의 후예로, 장구령을 실각시키고, 개원 22년(734년)부터 천보11년(752년)까지 현종 조의 재상으로서는 최장기인 19년간 재상의 자리에 올라 있던 인물이다.

등에게 맡겨둔 채 돌보지 않기 시작했다. 노노메 조후(布目潮渢), 구리하라 마쓰오(栗原益男), 슈도 요시유키(周藤吉之), 임대희 옮김, 『위의 책』, p130.



현종은 양귀비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그녀의 친인척을 궁과 관직에 대거 등용하였는데 대표적인 예로 양국충(陽國忠)이 있다.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의 본명은 양소(楊釗)로, 건달출신에다 부도덕한 간신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종에게 ‘국충’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권력을 쥐게 된 그는 천보 11년(752년), 이림보가 죽은 후 재상이 된다. 양국충은 당 현종 말기의 대표적 부패권력으로, 후에 안·사의 난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개원 24년(736년)부터 천보 연간에 걸쳐 조정에서는 간신이 제멋대로 정사를 농락하였고, 이렇듯 현종은 양귀비에게 정신을 빼앗겨 정치는 부패하였다. 농촌에서는 균전제가 무너져 국가의 세입원이 위협을 받게 되고 이에 따라 조정의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다. 또 군사 체제의 토대가 되었던 부병제 전국에 430개의 절충부(折衝府)를 설치하여, 21세∼59세의 정남(丁男) 가운데에서 3명당 1명씩 3년에 한 번씩 징집하여 근무하게 한 병농일치의 제도이다.

가 무너져 군의 사기와 전투력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반면 변경 지방의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절도사(節度使) 변경의 방비를 위하여 설치한 군사령관으로 군사, 재정, 행정 3권을 장악하였다.

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당 왕조를 위협하는 존재가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정세로 인해 당 왕조의 위기가 심화되어가고 있었다.